본문 바로가기
엔터 .가수 배우 연예인.음악 정보

‘나는 몰라요’의 주인공, 가수 옥희 별세… 남편 홍수환과 가족 곁에서 영면에 들다

by jiwon9312.tistory.com 2026. 6. 21.
반응형

 

‘나는 몰라요’의 주인공, 가수 옥희 별세… 남편 홍수환과 가족 곁에서 영면에 들다

작성일: 2026년 6월 21일 | 카테고리: 대중가요 / 연예 뉴스
가수 옥희예우회 '전설을 노래하다'(2024년) 음반 수록 사진 [예우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우리 대중가요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큰 별이 졌습니다. 1970년대 특유의 시원시원한 가창력과 세련된 무대 매너로 대한민국을 사로잡았던 가수 옥희(본명 김광숙) 님이 향년 7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지인들과 유족들의 전언에 따르면, 고인은 지난 2026년 6월 20일 오후, 경기 수원시의 한 호스피스 병동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최근까지 신장암으로 투병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마지막까지 무대를 향한 열정을 놓지 않았던 그녀였기에, 이번 비보는 대중과 가요계 동료들에게 더없이 큰 슬픔과 허망함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서울시스터즈로 데뷔해 큰 사랑을 받은 가수 옥희. 챔피언 홍수환 아내이기도 하다./사진=뉴스1

1. 신장암 투병 중에도 멈추지 않았던 ‘가요무대’와 노래 혼

가수 옥희 님은 지난해 신장암 진단을 받고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을 이어왔습니다. 하지만 암세포도 그녀의 노래를 향한 집념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고인은 몸이 성치 않은 상황에서도 대중 앞에 서기를 간절히 원했고, 올해 3월에는 KBS1 ‘가요무대’에 출연하여 이금희 원곡의 ‘정열의 꽃’을 열창하는 투혼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절친한 동료 가수 장미화 님의 인터뷰는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립니다. 장미화 님은 언론과의 통화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가요무대 연습 도중에도 옥희의 상태가 계속 안 좋아져서 주변 동료들과 스태프들이 모두 무대에 오르는 것을 말렸습니다. 하지만 옥희는 끝까지 무대를 고집했고, 결국 혼신을 다해 노래를 마친 직후 곧바로 응급실로 실려 가야 했습니다. 암에 걸리기 전에는 자신의 노래를 대중에게 더 알리겠다며 전국 방방곡곡의 노래교실을 직접 찾아다닐 만큼 몸을 바쳐 노래하는 열정적인 친구였습니다."

임종 전날에도 딸의 연락을 받고 병실을 찾았던 장미화 님은, 옥희 님이 부른 생전의 노래들을 함께 들으며 귓속말로 옛 추억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잠시 고인의 상태가 호전되는 듯하여 며칠의 시간이 더 허락될 줄 알았으나, 면회를 다녀온 직후 비보를 접하게 되어 가슴이 너무나도 미어진다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2. 미8군 무대에서 라스베이거스까지, 원조 ‘K팝 스타’의 개척길

1953년 한국전쟁의 참화 속, 피란지였던 부산에서 태어난 옥희 님은 악극단 활동을 하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음악적 DNA를 물려받았습니다. 휴전 이후 서울로 상경한 그녀는 예능적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했고, 배화여중 3학년이라는 어린 나이에 미8군 쇼 무대를 통해 본격적인 가요계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명동에서 의상실을 하던 고모의 주선으로 당대의 대가수 현미 님을 만나 쇼 공급업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 결정 계기였습니다.

그녀는 단순한 국내 스타에 머무르지 않고, 해외 시장을 먼저 개척한 '원조 해외파 아티스트'였습니다. 1968년, 5인조 걸그룹 ‘서울시스터즈’의 리더로 발탁된 옥희 님은 홍콩, 중동, 캐나다 등 전 세계를 누비며 무대를 가졌습니다. 특히 전 세계 예술인들의 꿈의 무대로 통하던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대형 호텔 쇼에 당당히 입성하는 쾌거를 이루어냈습니다.

이들의 놀라운 활약상은 현지 매체는 물론이고 전 세계 대중음악의 지표인 미국 빌보드지에도 대대적으로 소개될 정도였습니다. 생전 고인은 방송에 출연할 때마다 이 시절을 떠올리며 "우리가 바로 시대를 앞서간 원조 K팝 스타였다"라고 자부심 가득하게 회상하곤 했습니다.

(왼쪽) 가수 옥희(본명 김광숙)의 빈소가 마련된 21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영정이 놓여 있다. (오른쪽) 홍수환 씨가 빈소를 지키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3. 솔로 전향과 전성기, 그리고 메가 히트곡 ‘나는 몰라요’

해외 활동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국한 옥희 님은 솔로 가수로 전향하며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서구적이면서도 출중한 외모, 그리고 미8군 무대와 해외 공연으로 다져진 탄탄한 가창력과 무대 매너는 대중을 단숨에 사로잡았습니다.

여기에 당대 최고의 히트 작곡가 김희갑 님의 세련된 멜로디가 더해진 솔로 데뷔곡 ‘나는 몰라요’(1974년)는 폭발적인 신드롬을 일으켰습니다. 콧소리가 살짝 섞인 매력적인 음색과 귀여운 안무는 전국을 강타했고, 이 곡으로 옥희 님은 당해 MBC ‘10대 가수상’을 거머쥐며 톱가수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그녀의 히트 행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음과 같은 곡들이 연이어 메가 히트를 기록하며 70년대 가요계의 중심에 섰습니다.

  • 1975년: ‘눈으로만 말해요’
  • 1976년: ‘어디에 있을 것 같아’, ‘아 그날이’
  • 1977년: ‘이웃사촌’, ‘두 손을 잡아요’

발표하는 곡마다 라디오와 방송을 장악하며 옥희라는 이름 두 글자는 70년대를 대변하는 아이콘으로 자리매심했습니다.

4. 링 위의 챔피언 홍수환과의 영화 같은 사랑, 그리고 재결합

옥희 님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그녀의 영원한 동반자이자 복싱 세계 챔피언 출신인 홍수환 님입니다.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과 최고의 인기 디바의 만남은 1970년대 후반 온 나라를 들썩이게 만든 최고의 스캔들이자 뜨거운 화제였습니다.

두 사람은 1977년 축복 속에 딸을 출산하며 동거 생활을 시작했으나, 안타깝게도 성격 차이 등으로 인해 불과 1년 만에 결별을 선택하며 각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대중의 기억 속에서 멀어지는 듯했던 두 사람의 인연은 영화처럼 다시 이어졌습니다. 결별 후 무려 16년이 지난 1995년, 두 사람은 극적인 재결합을 발표하며 대중에게 큰 놀라움과 감동을 안겼습니다.

세월의 풍파를 견뎌내고 다시 손을 잡은 부부는 이전보다 훨씬 돈독하고 성숙한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2000년에는 부부가 함께 목소리를 모은 ‘옥희&홍수환 찬양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으며, 다양한 자선 음악회와 방송 무대에 나란히 출연해 잉꼬부부로서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특히 홍수환 님은 옥희 님이 신장암 진단을 받은 후, 최근 마지막 순간까지도 병상 곁을 묵묵히 지키며 지극한 간병을 도맡아 한 것으로 알려져 주위를 더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5. 마지막 순간까지 전설을 노래하다… ‘인생 열차’를 남기고 가다

재작년인 2024년, 옥희 님은 의미 있는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미8군 무대 출신의 원로 가수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음악 동인 ‘예우회’와 손을 잡고 컴필레이션 앨범 '전설을 노래하다'를 발매한 것입니다.

이 앨범에 수록된 곡 중 하나인 ‘인생 열차’는 고인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공식 취입곡이 되었습니다. 마치 본인의 파란만장했던 삶과 음악 여정을 담담히 정리하는 듯한 이 노래는, 이제 그녀를 그리워하는 팬들에게 슬프고도 아름다운 유작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병마와 싸우면서도 마이크를 놓지 않았던 그녀의 열정은 후배 음악인들에게도 큰 귀감이 될 것입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으며, 대중음악계에 기여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 장례는 대한가수협회장으로 경건하게 치러질 예정입니다. 유족으로는 오랜 세월 희로애락을 함께한 남편 홍수환 씨와 슬하의 1남 1녀가 있습니다.

70년대 우리에게 환한 미소와 시원한 노래로 위로를 주었던 가수 옥희 님. 비록 그녀의 육신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녀가 남긴 명곡 ‘나는 몰라요’와 ‘이웃사촌’, 그리고 무대 위에서의 열정은 영원히 대중의 가슴속에 살아 숨 쉴 것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천국에서는 아픔 없이 평안하게 영면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