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날, 세상을 밝힌 글자의 날
한글날(韓글날)은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문자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를 기념하는 날이다. 매년 10월 9일, 우리는 한글이 지닌 위대함과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을 되새긴다. 한글은 단순한 문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백성을 위한 사랑의 기술이며, 오늘날 대한민국 문화의 근간이 되는 소중한 자산이다.
📜 한글의 탄생, 백성을 위한 혁명
조선 세종 25년(1443년), 세종대왕은 백성을 위해 새로운 문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의 공식 문자는 한자였다. 그러나 한자는 배우기가 어렵고, 백성은 문맹 상태였다. 세종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나 글로 표현하지 못해 늘 답답해한다”라며 이를 안타까워했다. 그는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훈민정음(訓民正音,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을 창제했고, 1446년 반포하였다.
훈민정음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과학적 문자 체계이다. 사람의 발음 기관을 본떠 자음을 만들고, 하늘·땅·사람의 원리를 적용해 모음을 구성했다. 한글은 철저히 논리적이면서도 배우기 쉬운 문자였다. 세종은 백성이 스스로 글을 배우고 생각을 표현하길 바랐다. 그 철학 속에는 “모든 사람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인본주의적 가치가 담겨 있다.
태종의 전격적인 결단, 셋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다

세종은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유교 정치와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웠고, 후대에 모범이 되는 왕이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출처 : David Hepworth at ko.wikipedia.com>
조선의 제 4대 왕 세종의 이름은 이도(李祹), 자는 원정(元正)이고, 시호는 장헌(莊憲)으로, 정식시호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1418년 6월 3일 조선의 제3대 왕인 태종은 세자 이제를 폐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았다. 태종은 [태종실록]을 통해 “행동이 지극히 무도하여 종사를 이어받을 수 없다고 대소신료가 청하였기 때문에” 세자를 폐하고, 반면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며, 치체(治體, 정치의 요체)를 알아서 매양 큰일에 헌의(獻議, 윗사람에게 의견을 아룀)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기에 왕세자로 삼는다며 그 이유를 밝혔다.
그리고 두 달 뒤 태종은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앉았다. 주상이 장년이 되기 전까지 군사 문제는 직접 결정하고 국가에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정부와 6조, 그리고 상왕이 함께 의논한다는 조건부 양위이긴 했지만 전격적인 결단이었다.
그렇게 조선 제4대 왕에 오른 세종의 나이는 당시 스물 둘. 어린 나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갑자기 왕세자로 책봉되는 바람에 준비가 부족했다. 집권 초기 대부분의 사안에“상왕의 뜻이 이러하니” 또는 “상왕께 아뢰어보겠소.”라는 말을 반복해야 될 만큼 어려운 입장이었다. 엄한 아버지의 테스트를 받는 갑갑하고 불안한 상황 속에서, 세종은 자신을 최대한 낮추고 무섭게 공부하며 그 시절을 보냈다.
호학의 군주, 책 속에서 길을 찾다
세종은 어린 시절부터 엄청난 책을 읽어대던 호학의 군주이다. 세종의 독서는 유학의 경전에 그치지 않았다. 역사∙법학∙천문∙음악∙의학 다방면에서 전문가 이상의 지식을 쌓았다. 본인 스스로 경서는 모두 100번씩 읽었고, 딱 한 가지 책만 30번을 읽었으며, 경서 외에 역사서와 기타 다른 책들도 꼭 30번씩 읽었다고 했다. “몹시 추울 때나 더울 때에도 밤새 글을 읽어, 나는 그 아이가 병이 날까 두려워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하였다. 그런데도 나의 큰 책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는 태종의 말이 전할 정도다. 단순히 책을 많이 읽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들을 정리하고 비교하는 능력까지 갖추었다. 사실 세종은 그저 경전의 문구나 외워 잘난 척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 내용과 이치를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더 깊은 생각을 하라고 학자들에게 주문하고는 했다.
1422년 태종이 죽고 재위 4년 만에 전권을 행사하게 된 세종은 태종이 만들어놓은 정치적인 안정 속에서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마음껏 펼치기 시작했다. 태종이 잡아놓은 국가의 골격을 완성해나가는 방법으로 세종이 택한 방법은 매우 학구적이다. 선현의 지혜를 신뢰했던 세종은 우선 유학의 경전과 사서를 뒤져 이상적인 제도를 연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골격만 갖춰진 제도를 세부사항까지 규정해나갔다. 작은 법규를 하나 만들 때에도, 그 제도에 대한 역사를 쭉 고찰하고 각각의 장단점을 분석한 뒤 그 단점을 보완하는 방안, 다른 제도와의 관련성, 현재의 상황을 고려했다.
조선의 제도와 학문, 예술의 기틀을 잡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다 보니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았다. 우선 제도 연구의 기본이 되는 사서들이 부족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세종은 [고려사]∙[고려사절요]를 비롯한 사서들이 더 정확하고 풍요로워지도록 학자들을 다그쳤다. 중국의 사서도 열심히 연구했다. 대표적인 역사서인 [자치통감] 완질을 구해 읽고 학자들을 동원해 이에 대한 주석서인 [자치통감훈의]를 편찬했는데, 이 주해본은 중국에서 간행된 것보다 완성도가 더 높다는 평을 들었다. 경전과 사서에서 찾아낸 제도를 적용하려면 우리 땅에 대해서도 보다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었다. 세종은 지방관들에게 각 지역의 지도∙인문지리∙풍습∙생태 등에 대한 정보를 요구했고, 이를 수합하여 편찬했다. 많은 자료를 간행하려다 보니 인쇄술이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세종 치세에 인쇄 속도가 10배로 성장했다.
물론 이렇게 많은 내용을 세종 혼자 연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세종은 집현전의 연구기능을 확대해, 정인지∙성삼문∙신숙주 등 당대의 수재들에게 연구를 분담시켰다. 이렇게 해서 윤리∙농업∙지리∙측량∙수학∙약재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편찬하고, 관료∙조세∙재정∙형법∙군수∙교통 등에 대한 제도들을 새로 정비했다. 이때 정해진 규정들은 나중에 조선에서 시행된 모든 제도의 기본이 되었다. 세종은 과학기술과 예술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세종 초에 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운관을 설치했으며, 혼천의∙앙부일구∙자격루를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박연을 등용해 아악을 정리하고 맹사성을 통해 향악을 뒤받침하여 조선에 적합한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세종의 위대함은 애민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세종은 조선시대 왕 가운데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졌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세종이 위대한 성군일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능력 때문만은 아니다. 세종은 백성을 사랑한 어진 왕이었다. 세종은 백성들에게 자주 은전을 베풀었고, 사면령을 빈번히 내렸으며, 징발된 군사들은 늘 기한 전에 돌려보냈다. 노비의 처우를 개선해주기도 했다. 주인이 혹형을 가하지 못하도록 했고, 실수로라도 노비를 죽인 주인을 처벌하도록 했다. 이전에는 겨우 7일에 불과하던 관비의 출산휴가를 100일로 늘렸고, 남편에게도 휴가를 주었으며 출산 1개월 전에도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왕이 너무 관대하면 백성들이 요행수를 바라게 된다며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세종은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많이 펼쳤다. 관대하고 은혜로운 왕이었다. 훈민정음 창제도 이러한 애민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국사를 돌보던 세종은 결국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출처 : http://www.flickr.com/photos/hendry/185985727>
사실 훈민정음 창제에 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거의 없다. 세종 최대의 업적이면서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 만들기 시작했는지, 구체적인 창제 동기가 무엇인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전하지 않는다. 심지어 세종 단독 작품인지 집현전 학자들과의 공동 작업인지에 대해서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엄청난 반대를 예상한 세종이 비밀리에 작업한 일이기에 그럴 것이다.
단. “사리를 잘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율문에 의거하여 판단을 내린 뒤에야 죄의 경중을 알게 되거늘, 하물며 어리석은 백성이야 어찌 자신이 저지른 범죄가 크고 작음을 알아서 스스로 고치겠는가. 비록 백성들로 하여금 다 율문을 알게 할 수는 없을지나, 따로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뽑아 적고, 이를 이두문으로 번역하여 민간에게 반포하여 우부우부(愚夫愚婦)들로 하여금 범죄를 피할 줄 알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는 세종의 말과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로써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가 있으며, 이로써 송사를 청단하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가 있게 된다.”라고 훈민정음 서문에 정인지가 쓴 글을 종합하여 훈민정음 창제의 실제 목적을 짐작해볼 뿐이다.
정신을 따라오지 못한 육체의 한계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초인적인 연구를 해나가다 보니 세종은 일찍부터 육체의 한계를 느껴야 했다. 30대 초반부터 풍질이 발병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며, 40대 초반에 이르러서는 하루 종일 앉아서 정사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나빠졌다. 스스로 “체력이 달리니 생각이 이전처럼 주밀(周密)하지 않다.”고 고백하는 장면도 보인다. 1440년부터는 독서도 거의 못했던 듯하다.
집권 후반기에 세종은 태종이 마련한 왕권 중심의 정치체제인 육조 직계제를 의정부 서사제로 개편하고 세자에게 서무를 결재토록 해, 왕에게 집중되었던 국사를 분산시켰다. 건강상의 이유이기도 했지만, 집현전을 통해 배출된 많은 유학자들로 인해 자신의 유교적 이상을 실현시켜줄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는 신권과 왕권이 조화된 유교적 왕도정치를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성공적이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여러 가지 병에 시달리면서도 새로 편찬된 책들을 수십 권씩 직접 검토하던 세종은 1450년 2월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비 소헌왕후 심씨를 비롯해 여섯 명의 부인에게서 18남 4녀를 두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세종대왕 [世宗] - 우리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왕 (인물한국사, 윤희진, 장선환)
한글
세상에서 가장 신비한 문자
세계문자 가운데 한글, 즉 훈민정음은 흔히들 신비로운 문자라 부르곤 합니다. 그것은 세계 문자 가운데 유일하게 한글만이 그것을 만든 사람과 반포일을 알며, 글자를 만든 원리까지 알기 때문입니다. 세계에 이런 문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한글은, 정확히 말해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은 진즉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한글’이라는 이름은 1910년대 초에 주시경 선생을 비롯한 한글학자들이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한’이란 크다는 것을 뜻하니, 한글은 ‘큰 글’을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한글의 창제 원리를 담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종이 직접 서문을 쓰고 정인지 같은 신하들에게 글자에 대한 설명을 적게 한 것입니다. 이 책이 1940년에 안동에서 발견될 때까지 우리는 한글의 창제 원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 책이 발견됨으로 해서 한글이 얼마나 과학적인 원리로 만들어졌는지 알게 되었답니다. 이 책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전적으로 성북동에 있는 간송미술관을 세운 전형필 선생의 공입니다. 선생은 아주 비싼 가격으로 이 책을 샀고 6∙25 때에도 이 책 한 권만 들고 피난 갈 정도로 이 책을 지키기 위해 몸을 바친 분입니다. 이 분도 [직지]를 세계에 알린 박병선 선생처럼 우리의 문화영웅입니다.

조선 세종 때 만들어진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에 있다.언해본 원문보기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이유 아직 잘 모르고 있어
한국인들에게 과거 유산 가운데 가장 자랑스러운 것을 꼽으라면 열이면 열 모두 한글을 말합니다. 그 이유를 물으면대개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기 때문” 또는 “가장 과학적인 문자이므로”라고 말하며, 어떤 사람은 “배우기 가장 쉬운 문자라서”라고 답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답들은 부분적으로만 사실일 뿐, 충분한 답변이 되지 못합니다.
우선 한글이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계의 문자는 그 나라 말만 정확하게 적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글로는 영어의 ‘f'나 'th'를 적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 다음으로 한글이 세계 언어학자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과학적인 원리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맞습니다. 그래서 미국 메릴랜드 대학에 있는 램지(Ramsey) 교수는 한글날에 학생들과 조촐한 자축연을 했답니다. 이렇게 멋진 문자가 나온 날을 축하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 한국인들은 어떤 의미에서 한글이 ‘과학적’인지 잘 모릅니다. 한글이 배우기 쉽다는 것도 이같은 ‘한글의 과학성’과 연관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인류 문자 발달의 정점에 서 있는 우리 한글

훈민정음 어제 서문. 백성을 위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의 뜻이 담겨 있다.
한글은 그 치밀함과 복잡함에 혀를 내두를 지경입니다. 그것을 여기서 다 설명할 수는 없고 가장 기본적인 것만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것을 알려면 인류의 문자 발달사를 간단하게나마 살펴야 합니다. 인류는 알다시피 한자 같은 상형문자로 언어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자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글자 수가 많은 것도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글자를 보아도 음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중국의 문맹률이 높았던 것이죠. 예를 들어 ‘西’자는 음이 ‘서’인 것을 대부분 알지만 이 글자와 비슷하게 생긴 ‘茜’자는 음이 ‘천’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이 때문에 인류는 일본 문자 같은 음절(syllable) 문자를 만들어냅니다. 일본어도 표음 문자입니다만 자음과 모음이 아직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한자의 ‘加’에서 따온 히라가나의 ‘か(카)’는 자음과 모음을 분리할 수 없지요? 그런데 우리글로는 ‘ㅋ+ㅏ’로, 로만 글자로는 ‘k+a'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글이나 로만 글자가 더 진보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한글과 영어의 진화 정도가 같습니다. 그러나 한글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발성 기관의 모습을 본 따 만든 자음, 위대한 과학성을 입증해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쓰는 법. 한글은 과학적으로 창제되어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다.
이제부터 한글의 과학성이 나옵니다. 어떤 외국인이든 대학 정도의 학력이면 1 시간 안에 자기 이름을 한글로 배워 쓸 수 있다고 합니다. 아니 어떻게 외국어를 한 시간 만에 배워서 자기 이름을 쓸 수 있을까요? 이게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한글의 자음부터 볼까요? 한글의 자음에서 기본 되는 것은 ‘ㄱ∙ㄴ∙ㅁ∙ㅅ∙ㅇ’인데 국어 교육이 잘못되어서 그런지 이것을 아는 한국인은 별로 없습니다. 자음은 이 다섯 글자를 기본으로 획을 하나 더하거나 글자를 포개는 것으로 다른 글자를 만들었습니다. ‘ㄱ·ㅋ·ㄲ’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앞 글자 다섯 개만 알면 다음 글자는 그냥 따라옵니다. 그런데 이 다섯 자음도 외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글자들은 발성 기관이나 그 소리 나는 모습을 가지고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ㄱ"은 '기역' 혹은 '그'라고 발음할 때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습을 본떠 만든 글자입니다. 이것은 다른 글자도 마찬가지라 ‘ㅇ’ 같은 경우는 목구멍의 모습을 본 뜬 것이지요. 그래서 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그런 까닭에 배우기가 아주 쉬운 것입니다. 한 시간 안에 자기 이름을 쓸 수 있다는 건 이런 원리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한글의 가장 큰 특징은 소리와 글자의 상관관계까지 생각해 만든 글자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영어의 ‘city'는 ’시티‘보다는 ’시리[siri]‘라고 발음되지요? 또 ’gentleman'은 통상 '제느먼[ʤénmən]‘으로 발음됩니다. 이것은 t라든가 r, n은 같은 어군이라 서로 음이 왔다갔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영어 글자들은 그 생김새에 아무 유사성이 없지요? 그래서 다 따로 외워야 합니다. 그러나 세종께서는 이 글자들이 모두 혓소리(설음, 舌音)에 속한다는 것을 아시고 같은 군에 모아두었습니다. 즉 ‘ㄴ·ㄷ·ㅌ·ㄸ(ㄹ은 반혓소리)’이 그것으로 글자의 형태들을 유사하게 만들었습니다. 세계의 언어학자들이 한글에 경탄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런 과학적 원리에 따라 한글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천지인 3개의 기호만으로 모음을 표현해
모음은 어떻습니까? 세상에 그 복잡한 모음 체계를 어떻게 점(ㆍ) 하나와 작대기 두 개(ㅡ, ㅣ)로 끝낼 수 있었을까요? 가장 간단한 것으로 가장 복잡한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천재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게다가 이 ‘ㆍ, ㅡ, ㅣ’에는 각각 하늘∙땅∙사람을 뜻하는 높은 철학까지 담겨 있습니다. 한글은 이렇게 간단한 모음 체계로 가장 많은 모음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천재적인 창조성 때문에 우리 한글은 휴대폰에서도 괴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자판에 한글을 다 넣어도 자판이 남아돌아가니 말입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문자가 있을 수 있을까요?
반포 450년 후에나 우리 글로 인정받은 한글, 앞으로 더욱 아끼고 바르게 사용해야
한글에 대한 예찬은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글은 모진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한글이 국문으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은 것은 반포 450년 후인 갑오경장(1894년~1896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제기에 어려운 세월을 거쳐 지금까지 왔는데, 지금은 영어 때문에 영 맥을 못 춥니다. 영어는 못 배워 야단인데 한글(한국어)을 제대로 쓰는 사람은 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말과 글은 쓰지 않으면 퇴보합니다. 한글을 지금까지 주마간산 격으로 보았습니다마는 한글은 여기서 설명한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위대한 문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008년에 재현한 훈민정음 반포의례
📖 훈민정음의 뜻과 구성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28자의 글자 중 24자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의 기본이 되었다.
- 자음: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예를 들어 ‘ㄱ’은 혀의 뿌리가 목구멍에 닿는 모양, ‘ㅁ’은 입술 모양을 형상화했다.
- 모음: 하늘(·), 땅(ㅡ), 사람(ㅣ)을 기본 원리로 하여 조화롭게 구성했다.
이처럼 한글은 음성과 철학이 결합된 문자다. 단순히 발음을 기록하는 도구가 아니라, 우주 질서와 인간의 조화를 담은 예술적 창조물이라 할 수 있다.
🌸 한글날의 유래와 변천사
한글날은 1926년 처음 제정되었다. 당시 조선어연구회(지금의 한글학회)가 세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가갸날’로 이름 붙였다. 이후 ‘한글날’로 바뀌었고, 광복 이후에는 공식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1949년부터 공휴일로 시행되었으나, 1991년 정부의 근로일 조정 정책으로 잠시 제외되었다. 하지만 국민의 요청과 문화계의 강한 요구로 2013년 다시 공휴일로 복귀했다.
오늘날 한글날은 단순한 휴일이 아니라, 우리 글의 가치와 세종대왕의 정신을 기리는 문화의 날로 자리 잡았다. 전국 각지에서 한글 서예전, 훈민정음 강연, 한글 디자인 공모전 등이 열리며, 해외에서도 ‘Korean Alphabet Day’로 알려지고 있다.
💡 한글의 과학성과 세계적 위상
한글은 세계 언어학자들이 인정한 ‘가장 합리적인 문자’다. 유네스코(UNESCO)는 1997년 훈민정음 해례본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유네스코는 또 세종의 업적을 기려 ‘세종대왕 문해상(King Sejong Literacy Prize)’을 제정하여, 전 세계에서 문맹 퇴치에 기여한 단체에 수여하고 있다.
한글은 단순히 한국인의 문자에 그치지 않는다. 오늘날 전 세계 언어학자들이 연구하고 있으며, 디지털 시대에도 가장 진보된 문자체계로 평가받는다. 자음과 모음의 조합만으로 무한한 음절을 표현할 수 있고, 컴퓨터·스마트폰 환경에서도 효율적으로 구현된다.
🌿 한글날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한글날은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날이자, 우리 문화 정체성을 되새기는 날이다. 한글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스스로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또한 한글은 대한민국이 문화적으로 독립된 민족임을 증명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한글날은 단순한 기념일을 넘어, 소통과 창조의 날로 발전하고 있다. 세계 속의 K-콘텐츠, K-POP, 웹툰, 드라마가 모두 한글로 만들어지고 전 세계에 전파되고 있다. 세종이 꿈꾼 ‘모든 백성이 스스로 배우는 세상’이 지금 현실이 된 셈이다.
✨ 우리가 지켜야 할 한글의 미래
하지만 한글의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신조어, 외래어, 줄임말의 범람 속에서 한글의 아름다움이 훼손되고 있다. 한글날은 단순한 축하의 날이 아니라, 우리 글을 바르게 쓰고 지키는 다짐의 날이어야 한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했듯, 우리는 미래 세대를 위해 한글을 올바르게 전승해야 한다.
“한글은 세종의 사랑이자, 대한민국의 혼이다.”
1446년 (+211756일)
2025년 제579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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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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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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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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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 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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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일에 관한 법률」제2조 제1항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제2조 제2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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